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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Review

흐름과 파장, 이루리의 기하학적 추상 조각

by Rain Spell 2024. 4. 3.

이루리 개인전 <Pang’s 발신인 없는 위문편지> Review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험한 것들이 채워지고, 이 반복적 경험은 파장을 일으켜 흐름을 형성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간의 형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걸어본다. - 작가노트 중

 

 

2018년 작가는 첫 개인전을 개최하며 전시 카탈로그를 위와 같은 노트로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거친 제몫의 경험은 파장을 일으켜 흐름, 즉 작품이라는 결과를 형성하는데 이 과정 자체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2018년 첫 개인전에서 작가는 속이 빈 짧은 철 육면체를 유닛으로 사용해 그것을 용접해 이어 붙인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가 표현한 대로 이 작은 철 조각은 일렁이는 형태로 더 큰 파장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작업 <2793>에 쓰인 철 유닛에는 마치 녹음, 녹화 버튼 같은 빨간색이 칠해져 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작가는 마치 녹화 버튼을 누르듯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이 조그맣게 칠해진 빨간색은 이후 작가의 작품에 다양한 색을 만드는 파장의 시발점이 되는데 이를테면 2019년 작품에서 크기가 달라진 유닛 하나하나에 과감한 채색을 입힌 시도를 들 수 있다. 유닛으로 이루어진 익명적 세계에 각각 개성을 부여하는 이 작업은 한편, 마감되지 않은 공산품 형태의 유닛을 나열함으로써 산업화 사회의 미감을 낯설게 보여준 미니멀리즘 작업에 대한 비평적 코멘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차가운 철 조각에서 추상성과 익명성 대신 생생한 구체성을 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가 애초 형태를 계획하고 작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철 조각 하나하나를 이어 붙이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이 과정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존배John Pai를 떠올리게 한다. 작은 철사 조각을 일일이 용접해 커다란 형태를 만드는 존배 또한 즉흥적 작업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버릴 것 없는 철사 조각을 이어 붙이며 의식이 이끄는 대로 형태를 만들어가는 존배 선생의 태도와 이루리의 태도는 닮아 있다. 이루리 작가의 경우 작품의 최종 마감보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일종의 명상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더욱 직관적인 작업일지도 모른다.

 

 

 

 

 

다시 작가의 말로 돌아가자면 작은 철 조각에서 시작해 그것을 조합하고 변형해가는 과정은 이루리 작가의 경험이 쌓이고 그의 세계가 확장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한 가지의 대가> 작업은 현재 <Pang's> 작업을 거치며 조형적 변화의 국면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명상으로서의 작업은 추상적이고 익명적인 세계에 대한 욕망과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된다. 얼굴 없는 캐릭터를 유닛으로 작업한 <Pang's> 연작은 철사들이 터지듯 삐져나오는 방식으로 내적 불만을 드러내고자 했지만 이후 색색의 덩어리를 조합해 얼굴 대신 배치한 작품들은 누구나 쉽지 않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위로와 위안을 주는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다. 몇 가지 자세를 가진 머리 없는 몸과 철사, 덩어리 등은 이루리가 사용했던 철 조각 용접 작업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닛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서로 조합되어 또 다른 유닛 작업이 된다. 이렇듯 작가가 흐름과 성장으로 묘사했던 작업 방식은 다양한 조합의 여지를 지닌 진화형의 형태로 다시 발전해간다.

 

 

 

 

 

최근 조각 전시가 붐을 이루는 가운데 기하학적 추상 조각 작품 또한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이루리 작가의 작업은 원색 철봉이 이루는 다양한 형태의 조합으로 현대 조각의 확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도록 한다. 2021년부터 변화한 작품의 외형은 작가에게 여유와 노련함이 더해졌음을 방증한다. 시간의 흐름과 파장을 강렬한 색채와 다채로운 모듈로 표현한 작가의 작업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앞으로 더욱 가뜬해진 득의작을 만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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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 Sp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