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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에 관하여 About Contemporary Art

미술 시장이라는 풍문

by Rain Spell 2024. 4. 4.

 

이글은, 지금이 2024년 이니까 8년 전에 시장과 한국 현대미술 상황에 대해 썼던 글입니다. 8년 간 아주 빠르고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아주 강력한 이슈가 있었지만, 그간의 변화를 반추하여 앞으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 시장이라는 풍문

 

2016, 미술계가 한동안 언론을 장식하며 화제였다. 조영남 대작 사건을 둘러싼 잡음, 노 화가들의 위작 시비, 혹은 단색화의 뒤늦은 해외 시장에서의 선전등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 젊은 작가들과는 별개로 미술 판이 들썩이고 있다. 한켠에서는 예술이 노동인지 아닌지, 국가가 제도적으로 예술을 지원하고 복지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논의와 예술가의 활동을 법적 테두리 안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올해(2016년) 54일 개정안이 통과된 예술인복지법은 서면계약 체결을 의무화해 구두계약 관행을 해소하고, 예술인에게 불공정행위를 저지르는 사업주에 대한 제재를 강화한다고 한다. 미술가라는 직업이 고립되고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 이러한 법적, 제도적 정비는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결국 자본주의 안에서 직업적 삶을 영위해가는 미술가의 삶은 시장의 룰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룰이 공정한가, 아니 공정하다는 신뢰를 주는가이다. 필자의 결론은 공정하지도 않거니와 한 톨의 신뢰도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 돈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 있을까?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미술의 자율성이 기성품인 데 기인한다고 말한다. 즉 주문 생산품이 아닌, 다시 말해 주문자의 취향이 배제되어 제작자의 개성이 표현된, 이미 제작되어 있는 것이 팔린다는 점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추적한다. 결국 아도르노의 이론은 우리가 환상처럼 좇아왔던 예술의 자율성은 결국 시장 안에서만 작동하는 구체적 현실임을 지적한다. 르네상스 이후 주문 생산에서 벗어난 현대미술은 언제나 자본주의 안에서만 작동할 뿐이다.

 

 

전시장을 운영하며 전시와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일을 하는 필자에게 시장은 다른 나라의 일로 여겨진다. 나아가 한국에는 시장이 없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2014년 한국 미술 시장의 규모는 민간, 공공부문을 합쳐서 약 4천 억 원으로 추정한다. 당해 전 세계 미술 시장은 77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미술 시장 크기는 세계 시장의 0.5% 정도다.

 

사업가들에게 0.5%의 시장은 시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실제 거래되는 작품들 또한 억대 이상 고가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아르바이트로 고군분투하며 작업하는 미술가들에게 한국 미술 시장은 멀리 유리 지붕 너머의 이야기다. 스토리텔링과 신화로 덧씌워진 대가의 작품과 일부 경매 시장을 통해 성장한 블루 칩 작가가 아니면 시장에 진입할 수조차 없는 구조인 것이다. 미술품 시장이라는 특수한 시장의 성격을 감안해도 한국의 상황은 미술계가 존립하고 굴러간다는 사실 자체가 미스터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 구조를 들춰내고 현실을 고발하는 작가들도 여전히 많다. 이들의 눈에는 실제적인 노동 기본권과 계약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쳐나가려는 작가들이 자본주의적 질서에 투항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시장주의로 대표되는 모더니스트적 예술가관은 시장과 아예 무관하거나 극히 시장주의적인 극과 극의 작가적 태도를 낳았고 그 해악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젊은 작가들조차 판매와는 상관없는 듯 자신의 작품 가격을 높게 책정하며 싼 것은 저급한 것이고, 비싼 것은 고급한 것이라는 2분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하나의 예다.

 

 

미술 시장과 관련해 미술계 자체는 여러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는데 IMF 구제 금융 시기 이후 더욱 확고해진 대기업 위주의 기형적인 한국 경제 구조 자체가 미술 경제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급은-물론 비정상적으로 규모가 크지만-형태를 갖추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몇몇 승자가 독식하는 미술 시장의 구조는 한국 경제 구조와 궤를 같이 한다. 자신의 기호를 과시하고 부를 과시하기 위한 예술 구매는 재미와 흥미 위주 외에 투자 가치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술가를 후원하기 위한 작품 구매나 후원도 몇몇 기업의 작가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다.

 

 

극소수의 콜렉터만이 존재하고, 화랑들 또한 소수의 메이저 화랑이 경매회사를 겸업하는 등 기업화하여 미술 시장 규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고 구매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우환과 최근 이슈가 된 단색화 화가들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줄을 선다. 또한 미술품 거래는 기업의 비자금 조성과 증여세 포탈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위작, 대작 문제가 난무하고 학력 위조 사건이 빈번하며 영화배우, 가수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름값을 앞세워 수많은 작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술 시장에 진입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젊은 미술가들에게 시장은 없다. 개는 먹을 것을 주지 않는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했던가. 생활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미술은 딱히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한국 사회는 자본이 고착화되었고 모든 활동은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문화입국보다는 문화산업입국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한류 산업등 성과 위주의 문화예술 품목에 지원이 집중된다. 수많은 미술대학에서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왔고 많은 이들이 현대미술의 본고장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제 한국 미술은 웬만큼 평가를 받는 작가가 많은, 가운데 배가 불룩한 정상적인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작가들은 전시를 위한 지원은 받을지언정 작업실 임대료와 밥 사먹을 돈은 지원 받지 못한다. 예술인복지재단이 생기고 몇몇 서류 작성이 가능한 작가들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긴급이라는 이름으로 지원받아 생을 이어나가고 있다. 헌데 시장이 없다면, 다시 말해 수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급도 자체적으로 줄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물론 많은 미술대학 출신들이 피씨방 사장님이 되고 인테리어 업자로 전향하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여전히 미술가들은 수요에 비해 과도하게 많다. 그리고 여전히 홍대, 서울대를 위시한 주요 대학들의 경쟁률은 사법고시 패스보다 어렵다.

 

 

분명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미술대학 진학이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일 수도 있다-많은 이들이 예술가가 되기를 희망하고 미술대학에 진학한다. 물론 예술을 행한다는 것 자체를 시장경제 원리와 등치시킬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만큼 예술은 특수한 것일 수 있지만 사회 다른 분야와 비교했을 때는 기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여러 잘못된 구조가 숨어있는데 근본적으로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의 문제와 자식을 교육시키는 부모들의 그릇된 태도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대학 진학만을 위해 뒤늦게 미술을 선택하는 이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고 더불어 어느 정도 경제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면 대학 진학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 생겨난 수많은 미술 관련 대학원 현상을 보면 학자를 배출하거나 현장에서 활동하는 실무자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공급/정원 늘리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 대학원에 진학하는 이들 또한 한 학기에 10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만 투자하면 예술 관련 학위 혹은 수료증을 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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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예술의 자율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70, 80년대 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한 미술운동은 의제가 확실했고 목적이기보다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강했다. 80년대 말, 90년대는 한국이 후기산업사회로 막 진입하기 시작했던 때로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에 대한 논의, 현대미술 자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던 때라 과도기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90년 대 초, 중반 유학한 많은 이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현대미술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한국 미술 시장이 활황이라고 불리던 때가 있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팔려나가고 그중 몇몇은 스타 작가 대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거품은 꺼졌고 미술 시장은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아시아청년미술제 아시아프 ASYAAF에서 대학생 작가들은 처음 작품이 팔려나가는 쾌감과 가능성을 경험하기도 하고 반짝 활황이던 때에 젊은 작가들은 몇몇 메이저 갤러리들의 전속 작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사는 사람은 드물고 시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에서 담론이 사라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슈가 된 것도 아티스트 피, 국립현대미술관 청년관, ‘신생공간’, 예술인복지법 등 작가들의 생존과 관련된 현안만이 논의되고 있다. 왜 담론이 사라졌을까?

 

 

담론은 결국 예술의 자율성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16년 시장의 부재로 인한 작가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 하에서 작가들은 자율성을 담보한 내용적 담론을 생산해내기보다는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현실적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혹은 기존 인사동과 갤러리 중심의 미술 시장에 편입해 팔릴 만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주요 갤러리가 미술 시장의 양대 축이라는 경매사들을 운영하며 시장을 왜곡해온 기존 질서 아래에서 희망은 없다. 시장 질서를 거부하기보다 새롭게 활용할 시장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

 

 

2015년부터 정부가 한국 미술 시장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 정책을 시작했다. ‘굿즈라는 이름의 작가 아트페어가 4천 만 원을 지원받아 8천 만 원 매출을 올렸다. 특이할 점은 영국 회사인 어포더블아트페어가 국내로 들어와 동대문디자인 플라자에서 아트페어를 열고 14억 원 어치의 작품을 팔았단다. 홍콩,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한국에도 해외 자본 아트페어가 들어왔다. 하지만 14억의 매출 자체의 신빙성이 없고 2016년의 성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을 했을 것이나 한국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 자체가 한국 미술 시장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특이한 구조 속에서 시장이 활성화되거나 정착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지만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세대가 경제력을 주도할 때가 온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중견작가와 신진작가를 아우르는 전시를 꾸준히 열어온 합정지구는 새로운 컬렉터를 개발하는 여러 전략을 만들어가고 있고, 조해준 작가가 전주에 오픈한 뜻밖의 조작가숍은 레지던시와 작업실, 미술품 숍을 결합한 새로운 공간 실험을 통해 자립을 모색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굿즈의 시도로 씨가 뿌려진 작가 주도형 아트 페어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으로 곳곳에서 오픈을 앞두고 있다. 기존 대형 갤러리 중심의 미술 시장은 이들 젊은 작가들이 열어나갈 미래에 어떤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까. 이야말로 미술계에 자리를 걸치고 있던 이들이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문제 아닐까.